우체통
본가에서 본문
광천 508년.
그 날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푸르른 녹음이 가득한 여름날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풀벌레 소리는 유독 선명하였고, 훈련기관에 다닌 지도 벌써 여러 해. 때마침 여름 방학의 시작점이었으며, 도착한 지는 이틀이 지났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마당까지 나와서 반겨주는 이 하나 없으리라고는 예상하였다. 오히려 이것이 익숙했다. 과장하여 환대를 받느니 차라리 이 적막함이 좋았다. 오라비며 누이며, 하나같이 제 할 일에 몰두해 있었으므로 배웅을 나온다면 오히려 그것이 괴이쩍은 일이었다. 본가 바깥에서 정성을 들여 붓털을 보고 있을 또 다른 가족이라면 몰라도. 내일은 그들을 보러 나갈 것이었다.
그저 반복이었고, 그렇기에 이마께에 작은 다툼으로 생긴 흔적 역시 조용히 지나갈 것이었으리라.
늦은 밤, 본가의 대청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이렇게 밤 산책을 한 지도 오래되었다. 다시 한 번 여기에 발을 디딜 때마다 울범에 대적해야 한다는 두려움은 점차 신기루같이 사라져갔고,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지내던 나날이다.
용의 후예로 타고난 이무기라면 그 힘을 응당 나라를 위해 베푸는 것이 의무. 그것이, 금화국에서 자신에게 내린 역할이었으니.
또한, 그것은 제가 본가에 오자마자 숱하게 들었던 말. 현 당주께서는 나의 손을 붙잡고 강조하셨더란다.
" 이무기로 태어난 것은 죄악이 아니다. 금화의 모든 백성에게도, 우리에게도, 네가 이무기로 태어난 것은 경사가 될 만한 큰 축복이다. 부디 훌륭한 어른으로 장성하여 우리의 자랑이 되어 주지 않으련? "
이제는 아득해진 그와의 첫 만남에서도 들은 말.
붓과 붓털로 가득 차 있던 세상을 떠나, 으리으리한 기왓집 아래에서 새 지아비를 만났고,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아 오곤 했었다.
당주께서는 여태 귀족과는 매우 다른 분이셨다.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입신양명을 꿈꾸고 있기 마련이거늘, 그는 위로 올라가는 것에 욕심이 없었다.
언제나 옛 선현들의 말씀을 읊으며 바른 길만 걸어오셨고, 그 걸음걸이마저 더없이 이상적인 분이셨다.
어느새 나의 거울이 되어버린 그분께 한 걸음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었다. 가문의 정원에 피어 있는 난초처럼, 언제나 올곧고 청렴한 자로서 있도록 정진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그렇지 않고서야 당주께서 그에 반하는 말을 하시는 걸까. 이는 내가 아는 다른 사람이 분명했다.
늦은 밤이었고, 곧 잠을 청할 시기라 내가 잘못 들었던 걸까.
오래 전 나의 손을 잡고 가문의 역사에 대해 즐거운 투로 이야기하던 것이 아릿하게 떠오른다. 결국 그러한 올곧은 행색도 만인의 지지를 얻기 위한 계책이었다면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느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재물과 권력을 탐내는 법이다. 하지만 그 주체가 내내 존경을 표하던 아비라면 말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가문을 대표한다며 나간 자랑스러운 자리에서마저..아니, 애초에 나 역시 그를 위해 이용된 존재였다면...
그런가. 그 역시 지천의 모든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정치에 몸담은 이상, 입신양명과 완전히 멀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이내 받아들여 버린다. 하지만 동시에 안에서 무언가가 재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고요해졌다. 당신이 항시 제게 언급했던 것은 옛 선현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이었고, 힘을 가진 이로 태어났다면 그 힘을 베풀 줄 아는 자가 되라 하였다. 그것이 내 안의 법도요, 지표였는데.
그런 당신이 속세의 권력을 탐한다면 나에게 그간 이른 것들은 죄 허상에 지나지 않던가?
이곳에서 가장 이상적인 자는 없었다. 그가 완전하지 못하다면, 그의 가르침 속에서도 완전한 정답도 없다는 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어쩌면 오래 전 절친한 친우가 말한 대로, 규칙과 법도에 마냥 수긍하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하늘을 보게 되었다. 그만한 자격이 있고, 그만한 힘이 있으며, 그만큼 베푸며 살아왔다면...
기실, 나 자신이 무너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을 뿐이다.
온몸을 뉘우니 누군가가 귀에 속삭인다.
길이 없다면, 내가 믿는 선 善 을 따르면 되지 않겠냐고.
다른 이의 인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네가 하는 모든 것에 의의를 둠이라 함은, 네 자신의 뜻이면 되지 않겠냐고.